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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밥 생각뿐이다. 아빠가 먹을 밥. 암이 있는 그가 한 그릇을 싹 비울 그런 밥. 밥이 달다 하다가 이내 사는 게 달다 할 그런 밥. 그런 밥을 어떻게 지을까.
우선은 백진주쌀을 살까 한다. 낟알이 작고 석고처럼 뽀얀 흰빛을 내기에 백진주라고 부른다는 쌀. 그 쌀을 담은 그릇에 물을 받아서 쌀알이 깨지지 않도록 손에 힘을 풀고 부드럽게 휘저어 쌀뜨물을 버리길 두세 차례. 백진주쌀을 씻어낸 물은 우유인 양 진해서 버리기가 아깝다. 그런 미련마저 씻어낸 깨끗한 쌀을 안쳐야지. 불릴 필요 없이 바로.
요즘 밥 생각뿐인 이유
백진주 품종은 멥쌀과 찹쌀 중간 정도의 찰기를 가지고 인터넷1분대출 있어 불리지 않아도 밥이 부드럽고 차지며 달다고 한다. 밥물도 평소보다 적게 잡는다. 다 된 밥을 주걱으로 뒤섞고 그릇에 담아 양념을 한다. 소금과 참기름 정도만. 소금이 먼저, 기름은 나중. 기름이 코팅된 쌀에는 간이 잘 배지 않으니까. 한 김 식힌 밥을 손으로 잡아 세모꼴로 뭉칠 것인데, 소로는 뭘 넣을까? 참치마요는 너무 어린 맛 같으니 말고, 스팸 새마을금고 금리 은 초가공식품이니 말고, 씹어 삼키기를 힘들어하니 결이 살아 있는 다른 고기들도 말고. 그럼 딱딱하지 않은 잔멸치볶음이나 약고추장 정도일까.
소를 넣어 뭉친 밥에 달달한 간장을 앞뒤로 발라 기름 두른 팬에 지진다. 겉면이 전부 갈색이 될 때까지, 중간중간 밥을 세워 옆면을 챙겨서, 약불에서 오래 인내를 가지고. 아니, 미리 굽지 말아야지. 카드 등급 구워서 가져가면 눅눅해지니까. 굽기 전의 주먹밥을 도시락에 담아 기차를 타고 평창으로 가서 밥때에 맞춰 굽자. 따뜻하고 바삭하게. 이렇게 구운 주먹밥을 김과 먹어도 좋지만, 아빠에게는 김 말고 감태를 주고 싶다. 달고 쌉쌀한 감태가 혀에 먼저 닿아 녹아내리면 마른입에 침이 돌 것이다. 귀한 해초의 가늘고 여린 녹색 실들이 그렇게 해줄 것이다.
파산신청아빠가 형태가 있는 모든 음식을 넘기지 못하는 상태라고 해서, 다음으로는 죽 생각을 했다. 타락죽이 어떨까? 친구가 한번 크게 아팠을 때, 그 친구가 좋아했다는 타락죽을 더듬더듬 만들어본 적이 있다. 불린 쌀을 곱게 갈아서 우유를 조금씩 넣으며 끓이는데, 정말 쉽게 타기 때문에 부지런히 저어줘야 한다. 무겁고 빡빡한 흰죽은 이따금 큰 방울을 만들며 퇴직금 계산시 연차수당 퍽퍽 튀어 오른다. 소금으로 기본간을 하고 설탕을 넣어 달게 만든다. 약간 싱거운 상태의 죽을 간장 종지 두 개에 담아서 한쪽에는 백설탕을 , 한쪽에는 밤잼을 섞어 친구에게 주고 어느 쪽이 더 맛있는지 물었다. 기쁜 얼굴로 백설탕 쪽이라기에 옥색 그릇에 백설탕으로 간을 마친 우유죽을 담아 호박씨 몇 알을 올려서 줬다.
잣이라면 좋았을 테지만 동네 마트에 잣같이 비싼 견과는 없었다. 첫술을 뜨자마자 안색이 희게 피고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궁금해서 맛을 보니 온통 흰 맛. 흰쌀, 흰 우유, 흰 설탕의 맛. 갓난아기에게 먹이면 일주일 만에 어린이가 될 것 같은 맛이었다. 아기일 적에 이런 걸 먹고 자랐으니 쟤랑 나랑 이렇게 다른가보다. 그래서 쟤가 백합처럼 흰가보다 생각했다. 친구에게 해줬던 타락죽을 아빠에게도 해주면 어떨까. 동네 마트에서 사온 못마땅한 쌀로도 맛있는 죽이 나온다면, 백진주쌀로 만든 죽은 얼마나 맛이 좋을까. 분명 아빠도 좋아하지 않을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목을 넘어가서 몸에 흐르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
온통 흰 맛의 음식
얼마 전에는 서울에서 강원도로 도넛 배달을 다녀왔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아빠가 ‘올드페리도넛’이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은 아빠의 입맛이 새삼 감탄스러웠다. 징하기도 하지. 깜찍하기도 하지. 매일같이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이 정확하게 생각나는 사람은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플까. 아니면 주변을 고달프게 하든지. 그의 딸인 나는 먹고 싶은 걸 못 먹어도 큰 상관이 없다. 유명 브랜드의 도넛 상자를 품에 안고 새벽 기차에 오르며 제법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더 이상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지 않는 날 같은 건 상상도 못하는 채였다. 아빠의 입맛이 사라진 지금은 그때의 피로가 몹시 그립다.
1년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 하는 내 스승과 최근 열흘 동안 세 번이나 통화를 했다. 짐짓 뿌듯한 마음으로 서울 사는 딸한테 도넛 심부름까지 시킨다니까요, 푸념했더니 내게 글을 가르친 여자가 말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이니, 환자가 자기 입으로 먹고 싶은 걸 말해준다는 게.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그러네 싶어서 우리는 마구 웃었다. 스승은 뭘 가져가면 조금이라도 드실까, 그 생각만으로 시간이 다 간다고 했다. 먹고 싶다고 말만 해준다면 엄동설한에 산딸기를 구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암환자는 암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 죽는다고들 했다.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가 그런 시간을 안다는 걸, 그가 과거에 같은 시간을 건넜다는 걸 15년 만에 처음 알아서였다. 그는 그 시간의 초입에 이제 막 들어선 내게 전화를 건 거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박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박완서의 자전적 경험이 담긴 단편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화자는 중절모가 멋스럽게 어울리던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낸다. 독한 항암제 때문에 식욕이 깡그리 말라버리는 다른 환자들과 달리, 남편은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뭔가 맛있는 걸 먹자고 말한다. 들뜬 화자는 남편을 데리고 곧장 그 동네의 식당으로 간다. 남편은 자기 몫의 밥을 다 먹고 화자의 갈비탕도 뺏어 먹을 만큼 식욕이 좋다. 그러나 몇 분 안 돼서 남편은 길바닥에 먹은 걸 다 토해버린다. 아픈 이의 몸과 마음은 서로를 속인다. 그것만 먹으면 씻은 듯이 나을 것 같다기에 구해온 음식을 앞에 두고도 삼키지를 못하는가 하면, 굶주린 몸이 아우성을 쳐도 삶의 배신에 토라진 마음 쪽에서 식욕이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먹기를 방해하는 고통은 도처에 있다. 먹어야 산다면 실은 삶은 아주 드문 일인지도 모른다.
스승은 통화가 끝날 때마다 당부했다. 위로나 인사치레로 흘려듣지 말고, 밥 먹어. 정말 잘 먹어야 한다. 나도 사람들이 먹으라고 하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거든. 막 화가 나고. 그런데 틀린 말 하나 없어. 잠시 잊어버리라고들 하지만 어차피 잊는 건 할 수가 없잖니. 앞으로 뇌의 3분의 2는 항상 그 생각인 거야. 그러니 그런 김에 명랑한 일도 해.
삶은 무언가 먹고 싶어 하는 시간의 연속
매일 명랑한 질문을 한다. 오늘 뭐 먹지? 아픈 사람이 먹을 밥을 생각하고 다른 시간엔 내가 먹을 밥을 생각한다. 속이 비고, 속이 차고, 다시 속이 빈다. 사람은 빈속으로 와서 빈속으로 간다. 배고프게 나서 배고프게 간다. 삶은 다름 아니라 뭔가를 먹고 싶어 하는 시간의 연속체다. 여기저기서 뭔가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구경한다. 식당 앞에 골똘히 서 있는, 반짝이는 눈으로 메뉴를 훑는, 두 손을 다 써야 감싸 쥘 수 있는 넉넉한 그릇에 소복이 담긴 무엇을 처음부터 끝까지 먹어내는, 젖은 입을 벌리고 닫는, 보는 사람도 침이 고이게 하는. 이 치사하고 속된 몸을 가지고 걸어다니는 모두가 지나치게 찬란해 보여서 자꾸 눈이 시리다.
안담 작가
*냉장고와 도마 앞에서 하는 생각들. 사라지고 나타나는 한 그릇의 음식에 대해 씁니다. 출출할 때 참고하세요. 4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