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 통폐합 등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는 석유화학기업에 대해 채권금융기관(채권단)이 유동성 지원에 나선다. 채권단의 유동성 지원은 정부 주도의 사업 재편과 함께 석화 구조조정을 떠받치는 양대 축이다.
정부는 석화기업들이 나프타분해설비(NCC) 생산능력을 연내 270만~370만t 줄이는 자구안을 먼저 제출하면 이를 검토, 승인한 후 기업활력제고특별법(기활법)을 통해 각종 세제 혜택과 규제 특례를 준다는 방침이다. 채권단의 금융 지원은 대출 연장 등 당장 자금줄 확보가 급한 기업에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을 맡게 된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채권단은 오는 30일 첫 자율협의회 운영협약식을 갖고 석화기업에 대한 유동성 지원 원칙을 발표한다. 설비 통폐합, 합작법인(JV) 설립 삼영화학 주식
등 구체적인 경영·재무계획을 제출한 기업에 한해 만기 연장, 이자 유예 등 금융 지원에 나서겠다는 게 골자다.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11대 석화기업들이 은행권에서 빌린 여신 총액은 올 상반기 기준 32조8000억원에 달한다. 한화솔루션이 8조5000억원으로 가장 많고, 롯데케미칼(7조927억원), S-OIL(4조2077억원), DL케미칼(신천지게임
2조9952억원) 순이다.
이번 지원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과는 다른 채권단 주도 자율협약 형태로 추진된다. 자율협약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상 워크아웃처럼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채권단과 기업의 의사결정 재량권이 더 크고 지원을 받는 기업의 대외신인도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업계는 이날 윤곽이이승조
나온 채권단 지원 요건이 깐깐하다며 당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향후 만기 연장 등 유동성 지원에 난관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채권단은 석화기업들을 지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 만기 연장, 이자 유예, 이자율 조정, 신규 담보 취득 제한 등을 제시했다. 지원 가능한 옵션은 최소한으로 제시하고, 그 이상의 지원 방안은 채권단 협의회 결의로수익률
결정하기로 했다. 또 원금·이자를 감면하거나 자산 건전성을 재분류하는 등 적극적으로 채권을 재조정하는 옵션은 일단 자율협약에 담지 않기로 했다. 필요한 때 채권단 결의가 있다는 전제하에 신규 자금을 지원한다는 요건은 뒀지만 이마저도 지원 자금에 우선변제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석화업계 고위 관계자는 "정부에 이어 채권단이 내선물투자
건 요건이 까다롭다"며 "구조조정 계획안을 다듬으며 지원을 요청하는 과정이 매끄러울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석화기업의 자발적인 구조조정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19일 울산 석유화학산업단지를 찾아 조속한 사업재편 계획을 확정해달라고 직접 요청한 바 있다. 기초 석화 원료인 에틸렌 생산량이 가장 많은 여수 석화단지의 경우 정유사인 GS칼텍스를 포함한 수직 계열화 통합을 놓고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대산 석화단지에서도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가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의 지분권 조정을 놓고 논의를 진행 중이다. 김 장관이 직접 찾은 울산 역시 뚜렷한 구조조정 모델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석화업계에선 이처럼 난관에 봉착한 구조조정 논의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라도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금융 지원과 규제 완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히려 채권단의 구조조정 압박이 커질 경우 진행 중인 사업구조 개편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지원이라기보다 채권단 논리에 맞춰 '버티기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이라며 "사실상 정상 기업만 돕겠다는 방침이라면 구조조정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채권단과는 별개로 추가적인 지원 방안을 다듬고 있다. 우선 2조원 규모 한국산업은행 저리 대출 프로그램을 활용해 자금 지원을 유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은행은 자율적으로 공장 시설을 통폐합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구조 전환 대출을 운용하고 있다. 2%대 중반인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한 후 0.6%포인트 우대금리 혜택을 주는 저리 상품인데 올해 예산으로 2조원이 책정된 상태다.
당초 기업들이 과잉 공급을 해소하거나 신사업 분야로 진출할 때 지원하는 저리 대출 프로그램인데, 기업별 대출 한도가 없기 때문에 석화기업에 이 자금이 우선적으로 투입될 공산이 있다. 정부는 또 정책금융기관에 별도 계정을 운영해 지원하거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산하 기업구조혁신펀드 자금을 활용해 석화기업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환 기자 / 이용안 기자 / 추동훈 기자]